이집트에서는 B. C 3000년 전에 이미 의자와 침상의 사용이 가능하였음을 보여
주는 실물이 피라미드에서 출토하였는데 그 구조가 현대인들이 만드는 기법과 아주
유사한 수준에 이르러 있고 오히려 보편적인 것에 비하면 월등히 고급스러운 장식까
지를 갖추고 있다. 물론 이는 당대 최상의 인물을 위한 작품이므로 일반적인 것과 같
을 수 없는 월등한 수준의 것이겠지만 그런 기법이 발달된 도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도구와 기법이 그 시대에 이미 대단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음
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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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벽화·아부신벨피라밋
고구려 때는 분묘의 주인공의 화려하였던 생전의 대표적인 장면을 벽화로 그려
기념하는 풍습이 있었다. '고분벽화'로 부르는 이 벽화에 묘사된 생활의 모습에 의자
에 앉아 탁자를 가운데 두고 손님과 마주앉아 있는 장면도 있고, 침상에 정좌하고 있
는 모습 등도 보인다.
의자, 탁자, 침상이 생활의 도구였음을 알려준다. 4세기경의 이들 벽화로 해서
고구려 사회에 의자에 앉아 생활하는 입식의 생활방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데 이는 그런 의자, 탁자, 침상 제작이 그 시대에 가능하였음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 시원과 발전이 이미 그 이전 시대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증거의 한 단장斷章이
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그 동안 우리는 주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문제는 어느 시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겠느냐는 점에 있다. 그 점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말하기 어려
운 처지에 있다.
다. 고급의 기법
그렇지만 탐색의 방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고주몽은 아직 부여에서 탈출하
기 이전에 '일곱 모 난 주춧돌 위에 소나무 기둥을 세운'그런 고급한 수준의 건축기법
으로 완공된 집에 살고 있었다.
일곱 모 난 주춧돌의 '일곱 모'는 서양적인 개념의 현대 기하학에서는 조형하기
에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인도의 동전 등에서도 볼 수 있
는 정도로 '일곱 모'는 보편적인 것이며, 현대에서도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자동차
바퀴의 휠에 '다섯 모'와 함께 '일곱 모'가 채택되고 있음에서, 일곱 모의 가능성은 무
시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의 초기적인 양상을 우리는 B. C 1세기의 고주몽이 살던 집
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위에서 돌을 떠내면서 일곱 모를 동시에 떠내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알려주
는 기법의 자취가 있다.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수도에는 무수한 고분이 있다. 그 중의 태왕릉을 축조한
석재 중에 큰돌에서 갈라낸 쐐기자국을 남긴 것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돌을 둥근
원형으로 떠내었다. 지금의 기술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기법을 발휘한 것이다.
우리는 상고시대를 원초시대라 하면서 기법이 전혀 발달될 수 없었던 시기로 여
기고 있지만 저런 기법으로 돌을 떠낸다 든 지, 일곱 모를 접었다는 등의 점에서 보
면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이미 그 시절에 이룩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
을 것이다.
이집트에서도 화강암을 큰 바위에서 떠내던 흔적을 남겼는데 최소 BC 2000년
이전에 쐐기를 써서 돌을 갈라내면서 일직선으로 자르는 일 말고, 다각으로 떠내는
기법을 발휘하고 있다.
B. C 1세기의 고구려가 다각이나 원형으로 돌을 떠내려 하였다는 점을 무시하기
어려운 기법을 이집트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처럼 이집트에도 신전이나 무덤 안에 상당수의 벽화가 있
다. 그 중에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볼 수 있는 장면들도 적지 않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생활상태와 아주 유사한 모습들도 눈에 자주 뜨인다.
그 시절과 오늘에 큰 격차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겠다. 이집트 무덤
에서 출토한 철제鐵製 도구 중에도 현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있을 뿐만 아
니라 그런 도구를 사용하여 목재의 접합 이음새에 벌써 45도의 접합, 아주 고급스러
운 기법이 요구되는 '연귀법'을 구사하였음을 볼 수 있다.
고구려벽화에 보이는 실내 가구들의 모습과 멋진 장식이 당시의 생활도구를 실제
로 묘사한 그림이라고 보아 무리가 없고, 그것의 초기형상이 이미 고주몽의 그 시절
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국면의 한국문화사에 직면하게
되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
한국문화사도 국내에 존재하는 사료만으로 좁게 서술해야할 까닭이 없다면 세계
의 자료들로 시야를 넓혀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