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으로의 초대 - 6. 생활방식과 살림집

by 운영자 posted Dec 2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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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생활방식과 살림집



첫째. 삼국시대의 삶

가. 움집에서의 발전

고대 움집터 발굴에서 맨바닥만으로 정리된 것과 돌을 깔아 포장한 예 등이
발견되었다.
집이 차츰 발전되는 단계에서, 이처럼 바닥에 돌을 깔기도 하나 그 이전에는 삿자리
나 가죽이나 풀을 깔기도 하였다.

즐문櫛文이라 부르는 삿자리무늬가 토기를 장식하는 시대성에서 삿자리 존재가
주목되는데 집에 그런 가공된 시설물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맨바닥에서 일단 발전한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맨바닥이나 그 바닥의 포장은 일상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넓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건물 한 채가 통간通間이 되는 것이 보편적인데, 이는 움집 시대로부터 출발한 방식
이었다.

오늘날 발굴 조사되는 대부분의 움집은 칸막이 없는 통간으로 되어 있다.
이런 공간 구성에서의 삶의 방법은 처음엔 맨바닥을 이용하나 차츰 인지가 발달하면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피해 깔개를 만들어 까는 방식을 택하게 되며, 잠자리
에도 마찬가지의 시설을 하게 된다. 이른바 입식의 생활방도가 강구되기 시작하는 것
이다.


나. 입식의 생활과 깔개

이 경향은 집이 지표에 노출된 뒤로도 지속된다. 지표상의 집이라 해도 방바닥이
맨바닥일 경우는 움집이나 여건이 같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움집시대 보다 깔개는
다양한 발전을 하였고 집에도 칸막이가 채택되고 향유공간이 독립되기에 이르면서
깔개는 한층 더 활발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집트 벽화·아부신벨피라밋


고구려 때는 분묘의 주인공의 화려하였던 생전의 대표적인 장면을 벽화로 그려
기념하는 풍습이 있었다. '고분벽화'로 부르는 이 벽화에 묘사된 생활의 모습에 의자
에 앉아 탁자를 가운데 두고 손님과 마주앉아 있는 장면도 있고, 침상에 정좌하고 있
는 모습 등도 보인다.

의자, 탁자, 침상이 생활의 도구였음을 알려준다. 4세기경의 이들 벽화로 해서
고구려 사회에 의자에 앉아 생활하는 입식의 생활방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데 이는 그런 의자, 탁자, 침상 제작이 그 시대에 가능하였음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 시원과 발전이 이미 그 이전 시대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증거의 한 단장斷章이
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그 동안 우리는 주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문제는 어느 시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겠느냐는 점에 있다. 그 점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말하기 어려
운 처지에 있다.

다. 고급의 기법

그렇지만 탐색의 방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고주몽은 아직 부여에서 탈출하
기 이전에 '일곱 모 난 주춧돌 위에 소나무 기둥을 세운'그런 고급한 수준의 건축기법
으로 완공된 집에 살고 있었다.

일곱 모 난 주춧돌의 '일곱 모'는 서양적인 개념의 현대 기하학에서는 조형하기
에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인도의 동전 등에서도 볼 수 있
는 정도로 '일곱 모'는 보편적인 것이며, 현대에서도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자동차
바퀴의 휠에 '다섯 모'와 함께 '일곱 모'가 채택되고 있음에서, 일곱 모의 가능성은 무
시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의 초기적인 양상을 우리는 B. C 1세기의 고주몽이 살던 집
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위에서 돌을 떠내면서 일곱 모를 동시에 떠내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알려주
는 기법의 자취가 있다.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수도에는 무수한 고분이 있다. 그 중의 태왕릉을 축조한
석재 중에 큰돌에서 갈라낸 쐐기자국을 남긴 것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돌을 둥근
원형으로 떠내었다. 지금의 기술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기법을 발휘한 것이다.  

우리는 상고시대를 원초시대라 하면서 기법이 전혀 발달될 수 없었던 시기로 여
기고 있지만 저런 기법으로 돌을 떠낸다 든 지, 일곱 모를 접었다는 등의 점에서 보
면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이미 그 시절에 이룩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
을 것이다.

이집트에서도 화강암을 큰 바위에서 떠내던 흔적을 남겼는데 최소 BC 2000년
이전에 쐐기를 써서 돌을 갈라내면서 일직선으로 자르는 일 말고, 다각으로 떠내는
기법을 발휘하고 있다.

B. C 1세기의 고구려가 다각이나 원형으로 돌을 떠내려 하였다는 점을 무시하기
어려운 기법을 이집트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처럼 이집트에도 신전이나 무덤 안에 상당수의 벽화가 있
다. 그 중에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볼 수 있는 장면들도 적지 않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생활상태와 아주 유사한 모습들도 눈에 자주 뜨인다.

그 시절과 오늘에 큰 격차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겠다. 이집트 무덤
에서 출토한 철제鐵製 도구 중에도 현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있을 뿐만 아
니라 그런 도구를 사용하여 목재의 접합 이음새에 벌써 45도의 접합, 아주 고급스러
운 기법이 요구되는 '연귀법'을 구사하였음을 볼 수 있다.

고구려벽화에 보이는 실내 가구들의 모습과 멋진 장식이 당시의 생활도구를 실제
로 묘사한 그림이라고 보아 무리가 없고, 그것의 초기형상이 이미 고주몽의 그 시절
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국면의 한국문화사에 직면하게
되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

한국문화사도 국내에 존재하는 사료만으로 좁게 서술해야할 까닭이 없다면 세계
의 자료들로  시야를 넓혀야할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B. C 3000년 전에 이미 의자와 침상의 사용이 가능하였음을 보여
주는 실물이 피라미드에서 출토하였는데 그 구조가 현대인들이 만드는 기법과 아주
유사한 수준에 이르러 있고 오히려 보편적인 것에 비하면 월등히 고급스러운 장식까
지를 갖추고 있다. 물론 이는 당대 최상의 인물을 위한 작품이므로 일반적인 것과 같
을 수 없는 월등한 수준의 것이겠지만 그런 기법이 발달된 도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도구와 기법이 그 시대에 이미 대단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음
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