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생활방식
집안에서의 생활방식이 어떠하냐에 따라 집의 공간구성이 고려된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의자에 앉아서 생활할 때의 눈의 높이와 방바닥에 앉아 삶을 영위하는 눈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에 공간 구성법에 차이가 생겨나게 된다.
그 점은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섰을 때의 눈의 높이는
한 단계가 높아지는 것이지만 방바닥에 앉았다 일어서면 의자에 앉았다 일어서는 것 보다 두 배에 해당하는 증고增高의 차이가 생겨난다.
앉은키의 눈의 높이를 1단이라 하면, 의자에 앉은 눈의 높이는 의자의 높이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원초 시대이래 보편적인 높이를 고려한다면 약 두 배가되므로 2단의 높이라 할 수 있다. 일어서면 앉은키의 3배에 해당하는 눈의 높이가 형성된다고 보면 3단계에 해당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공간은 이 1단계에서 3단계에 이르는 높이를 고려하는데, 높이의 설정은 평면구성에 직결되고 건축가들은 이것을 고려한 이상적인 공간형성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있다.
사람의 눈이 바라다 볼 수 있는 통상적인 폭을 50도로 계산한다. 카메라 렌즈의 표준을 50도로 설정한 것도 그런 눈의 감각을 고려한 것이라 한다. 그 각도를 기준으로 삼고 좌우의 수직 벽의 간격이 탐구된다. 그 간격을 얼마로 하느냐가 그 민족이 지닌 공간 인식이다.
사람의 눈 높이를 공간 설정의 표준 수평기준으로 삼는다. 주 생활 높이가 1단이냐 2단이냐에 따라 바닥과 천장의 높이가 설정된다.
사람 눈의 각도에서 얻어지는 안정감을 염두에 두고 공간이 구성되는 것이라면 눈의 높이에서 공간의 천장 높이가 계산되어진다. 결국 공간의 구성은 인체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방바닥에 앉아 생활하면 '좌식 생활'이라 하고, 의자에 앉거나 하는 깔개를 이용하는 방식이면 '입식 생활'이라 분류하려 한다.
좌식생활은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입식생활은 대부분의 시간을 신발 신은 채로 활동한다.
고구려는 입식생활이 기본이었다. 조선왕조의 보편적인 좌식생활과 차이를 지닌다. 한 민족도 시기에 따라 생활방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려 주는 사례에 속한다.
고구려는 구들의 시원국가이므로 당연히 온돌방이 있었을 터인데 무슨 입식이 되겠느냐는 의문을 말하는 이가 있다.
고구려의 집터를 발굴하면 구들이 오늘의 우리들이 사는 온돌방과 달랐음을 볼 수 있다.
구들들인 고래가 동편 벽으로부터 북쪽의 벽을 따라 시설되다가 서편 벽에 이르러 끝이 난 모습을 자주 본다. 이는 방 전체에 구들을 놓은 것이 아니라 방의 일부에만 시설한 '쪽 구들'임을 알려준다.
지금도 압록강이나 두만강 유역의 살림집에서 보면 방 한편으로만 구들이 시설되어 있다.
역시 일종의 '쪽 구들'인데, 그로 인하여 방 한쪽으로는 신발 신은 채로 드나들 수 있고 그 맨바닥에는 의자를 놓고 앉을 수 있게 되었다.
고분 벽화 중에 '씨름무덤'이라 이름 지어진 석실고분이 있다. 중심에 그린 화면에 남자주인공과 두 부인이 묘사되어 있는데 두 부인은 방바닥 위에 방석을 깔고 앉았고 바깥주인은 의자에 앉아 있다. 맨바닥에는 찻잔으로 보이는 그릇이 있는 탁자가 놓였다.
엄격하게 말하면 좌식과 입식의 절충형, 아니면 두 방식이 공존하는 생활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쌍영총을 비롯한 매산리 사신총, 덕흥리 고분 등의 벽화에서는 주인공 내외분이, 혹은 한 분 씩 따로 안상으로 장엄한 좌탑 위에 정좌하고 앉아 있다. 이들은 좌탑의 발이 얕은 유형의 깔개인데 무용총에서는 높은 의지에 걸터앉아 있는 광경을 묘사하였다. 본격적인 입식생활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구들의 존재에서 보면 방바닥 위에서는 얕은 키의 좌탑에 앉고, 맨바닥에서는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생활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조의 사대부나 왕실에서는 온돌방에서 주인은 역시 좌탑에 올라앉아 생활하였다. 그런 좌탑은 뜰마루처럼 이동하는 것이며 아주 고급스러운 가구로 만들어졌다.
그런 좌탑의 일부는 지금도 유물로 남겨져 있고, 그것을 침상으로 사용하였을 때의 부속물들도 전해오고 있다.
고구려 이래의 관습이 조선조 후기에까지 그렇게 전래되어 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둘째. 살림집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단편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세부 사항까지를 파악할 수 있는 살림살이를 하는 광경과 건물이 묘사되어 있다. 특히 안악 3호분에는 경내에 여러 채의 집이 있고, 그들 용도에 따라 건물의 특성이 들어 나도록 그려져 있는데 반빗간, 육고간, 우물, 외양간, 방앗간, 마구간, 수레간 등이 망라되어 있다. 대신에 안채, 사랑채, 서옥斷屋 등은 생략되었다.
고구려에도 신라에서나 마찬가지로 안채와 바깥채(外堂)의 구분이 있었다고 보
인다. 김유신 장군이 외당에서 기거하고 있다가 임종에 임박하여 안채(內堂)로 옮겼다는 기록도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무난할 것인데 고구려 고분 벽화 건물도의 배치된 상항을 보면 그런 내, 외당이 경내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상류사회의 건물들은 대부분 기와를 이은 기와집이며 지붕에 부속기와를 써서 장식도 하였다. 치미의 존재로 해서 그런 점을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외양간의 존재는 농사 짓는데 소의 힘을 빌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고구려에서는 수레를 소가 끌기도 하였다. 물론 말이 끌기도 하였으므로 외양간과 마구간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
고구려 안악3호분벽화중
방앗간 그림
벽화 중에는 외양간 뒷방에서 디딜방아 찧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있다. 조선시대 디딜방아간이 외양간 이웃에 있었던 것과 진배없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집안의 우물은 사람이 빠지지 말라고 우물난간을 하였고 한 편에 말뚝에 장대를 걸고 두레박을 매달아 장대 한쪽을 누르면 물길은 두레박이 풀썩 솟아오르도록 하는 실용의 효과를 겨냥한 근대식의 시설도 설치하였다.
이런 시설들을 보면 삼국시대와 오늘이 다를 바가 거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마치 이집트 문화의 기반이 오늘의 현대적인 감각과 동일함을 느끼는 그런 분위기와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고구려를 위시한 상대의 살림집들의 근간이 지금과 같은 맥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주는 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집에 난방시설하고 겨울을 따뜻하게 지냈고, 생활의 편의에 따라 신발 신고 방에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말을 타는 사람들은 장화를 신는다. 단화를 신고서는 말타기 어렵다. 장화는 말 타는 이의 기본 장구여서 중국의 황제들도 호복胡服과 장화를 신었을 정도이다. 한족漢族에는 없는 복색이었다.
장화는 단화처럼, 드나들며 그 때마다 수시로 벗고 신기가 어렵다. 그러니 방의 일부를 열어주어 장화 신고 출입할 수 있게 하였고, 잠자는 시간에는 신발을 벗고 방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그에 비하여 말 타지 않는 아녀자들은 단화를 신고 있어 수시로 신었다 벗었다 할 수 있어 벗은 채 방바닥에 앉아 신발 신은 바깥사람과 정담을 나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