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건축가들
수십만 채,수백만 채 혹은 수천만의 집이 太初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든 건축물은 어떤
형태이던 建築家에 의하여 지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建築家라는 개념은 훈련되었든지, 훈련되지 않았든지를 區別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
렇지만 山間의 살림집은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지어진다. 마을 사람 전체가 집짓는 일
에 나선다. 그중 눈썰미 있고 손재주 있어 막음질 등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이
가 훈련되지 않았다는 점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公共建物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發注者가 있고 企劃·管理者가 있고 設計·施工者자 일을 분담하
게 된다. 이는 오늘의 방식과 같다.
현대에선 企劃·管理者도 일정한 과정을 훈련받은 사람이다. 設計와 施工者 역시 훈련된 사람들이
다. 이들은 서로 맡은 일이 다르면서도 建築家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길 희망한다.
이들의 본의로 생각한다면 建築家라는 이름은 꽤 넓은 성격이 부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도상
의> 작업(技能者), 實際의 작업(技能者)을 하는 사람들이 제각기 건축가로서의 基盤을 갖고자 원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은 도상작업만을 익힌 가냘픈 사람들에 의하여 더 강력히 욕망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분담한 일에 따라 그 이름이 명확하게 다르다. 하나는 "아키텍쳐"이고 또 하
나는 "엔지니어"이다. 그러나 이 이름에 따른 개념은 지역마다 시대에 따라 다르다. 우리는 "아키
텍쳐"를 건축가라고 부르려하는데 반하여 멕시코에서는 "잉에니엘"을 건축가로 보고 "아키텍트로
"는 技能者로 취급한다.
일에 따른 분담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을 짓기 원하는 建築主가 있고 그가 위촉하는 기획 ·
관리자가 있다. 이들은 새로 지을 집의 전반을 논의하고 그 규모를 설정한다. 기획 · 관리자는 보
통 土木役에 깊은 조예가 있어서 비록 자기 손으로 설계도를 그리거나 시공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일의 주선과 추진과 방향의 설정, 공정의 경과 등은 소상히 알고 있다.
건축주는 기획·관리자와 논의하여 설계·시공자를 선택한다. 설계와 시공자를 보통 宮闕을 짓는다
고 할 때 임금에 의하여 발주된다. 임금님이 건축주가 된다. 발의되면 그 일을 기획하고 관리할 都
監이 설치된다. 이 도감에는 都提調라는 최고 책임자가 임명되고 각기의 부서를 맡을 提調가 위촉
된다. 이들 제조중의 일부는 설계와 감리 등 실무에 참여한다.
건축주와 도감의 여러 사람들은 새로 지을 궁궐의 大要를 결정한다. 그들은 곧 설계·시공을 지휘
할 건축가를 물색한다. 이런 사람을 大木이라 함, 더러는 국가에 奉職한다. 국가에 봉직하는 대목
중의 우두머리를 木業指諭(都大木, 都司木, 都邊首)라 하고, 그에게는 각 분야를 담당하는 技術陣
이 예속된다.
한 예를 서울 남대문의 공사를 볼 수 있다. 이 공사에는 正五品 벼슬의 대목이 총책임자로 임명되
고 그의 隷下에 大木, 石手, 冶匠, 鞍子匠, 串錠匠과 方軍, 舡軍 등이 동원되었다.
그것을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남대문은 成宗10년(1479)년에 한번 더 改修된다. 이 때에도 기술자 그룹이 조직되었다.
이들의 벼슬은 대목이 禦?將軍으로 正三品 堂下官이고 都石手는 勵節校尉 從六品이며 畵員 迪副
將尉는 正七品으로 大木은 월등한 대접을 받는 직위이고 都石手는 그 보다 훨씬 격이 낮은 벼슬,
畵員은 그에 버금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이러한 等次는 이후 전시대에 걸쳐 고수되었고 大木이
위주되었다.
이와 같은 제도는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高麗史 祿俸條에 보이는 工匠
의 직위에 따라 이들이 건축활동에 참여하였을 때의 조직을 想定하여보며 대략 다음 표와 같이
되겠다.
이런 조직의 방법은 조선조와 거의 비슷하였던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고려의 木業指諭가 조
선의 대목으로 그 이름만 바뀌었다.
壬辰亂을 겪고난 후 이런 조직방식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사회가 발달되고 工役技能이 세분화
됨에 따라 분업의 성격이 농후하여졌고 그러한 것이 이 조직방식에 반영되었다. 高宗6年(1896
년)에 營建都監을 열고 東大門인 興仁之門을 중건하였다. 이때에는 다음 표와 같은 조직으로 공
사를 운영하였다.
초엽의 大木이라 할 목수편수(木手邊首) 수하에 木部從事부분이 ?踏·椽木·修粧·彫刻·木鞋·船匠·岐
鉅의 일곱 개 유형으로 세분되었다.
국초부터 말엽에 이르는 木手위주의 제도는 국영하는 건축물의 조직에서뿐만 아니라 祠·院의 權
威建築이나 백성들의 私家 경영에도 그대로 답습되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런 영향이 계속되
고있다. 대목이나 木手邊首라는 직위의 개념은 오늘날 건축가와 동등한 것이고 오히려 의미가 넓
어 시공 중의 종사자들의 기술적인 용역의 배려와 기능이 감독과 宿食의 통솔까지를 兼行하였다
대목이나 각 부분의 기술·기능자들은 계보에 따라 배출 등용되었고 그들 사회의 질서는 엄격하여
年下의 사람일지라도 일단 책임자로 임용되면 절대 복종하여야 되는 제도가 고수되었다
이런 조직의 방법은 고려, 신라에서도 대략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분야에 따른 가감이 있었
겠지만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기하여야될 의문에 부닥친다. 아비지라는 백제 건축가의 신라 사회에서의 활
동이 문헌에서처럼 실제로 가능하였던 것이냐의 여부가 궁금하여지는 것이다.
三國遺事(卷3. 黃龍寺九層塔條)에 선덕여왕 12년(643)에 慈藏法師가 唐나라에서 귀국하여 귀인
이 일러준 대로 황룡사에 구층탑 짓자고 건의하였다. 善德女王은 곧 9층탑 짓은 일을 착수하여
[鐵盤己上高 42척, 己下 183척]합계 225척의 거대한 탑을 완성하였다.
탑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시인들은 읊었다
어찌 사람만의 힘이랴.
귀신이 돕고
하늘이 부추겨
탑을 지으니
서울 장안의 제일일세
나는 듯 한 처마는
金碧으로 빛나니
꿈에 본 듯이 찬란하고녀
이 탑은 착공한지 2년만에 완공되었는데 백제 건축가 아비지가 이 일에 참여하였다.
탑을 조영하자는 논의가 있었을 때 여러 신하들은 백제에서 유능한 건축가를 초빙하여야만 이 일
이 이루어지겠노라고 하였다. 선덕여왕은 많은 예물을 보내어 초빙하니 백제왕은 아비지를 파견
하여 주었다.
아비지는 武烈王의 아버지인 龍春이 거느리는 200명의 小匠과 더불어 탑을 짓게 되었다. 단신 백
제에서 초빙된 아비지는 신라의 건축조직을 그대로 지휘하였다는 뜻이 되겠다. 龍春이 거느리는
小匠 200인도 고려나 조선왕조에서와 같은 조직으로 구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는
한 사람의 지휘를 소화시킬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지는 많은 백제의 건축가 중의 한사람이었다. 일본에 건너가 寺博士라는 칭호로 우대 받으면
서 건축물 경영에 참여한 다른 건축가들과 더불어 어깨를 겨루던 실력자였다고 생각된다. 기록에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 구체적인 사항은 알 길 없으나 이 건축가들은 사회의 신분도 상당하고 여
러사람들의 衆望도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선덕여왕이 선뜻 백제 건축가 초빙을 허락하는 까닭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음이 암시되어있다.
신라에서 일급의 왕족으로 하여금 백제건축가를 보좌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던 것은 백제 건축가
의 품격이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제 건축가 한사람 아비지가 초
빙되어 가서 전대미문의 9층탑이란 큰집을 지었다면 신라의 건축 사회가 백제의 그것과 같은
바탕이었을 것이고 그 건축사회의 조직도 한가지였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고구려도 아
마 같은 성격이었으리라고 보인다.
삼국이 통일된 이후, 이젠 신라인이 된 망국 백제의 건축가들은 자연히 신라 건축계에서 활약하였
을 것이다. 이제 그들 건축가의 이름은 거의 다 잊었지만 불국사 중창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阿
斯達이라는 전설의 인물이 있다. 그도 아비지와 동족인 실제의 건축가이었을지도 모른다.
백제 건축가들의 해외진출은 매우 활발하여 신라, 일본 등지에 많은 사람들이 건너가 자기의 기량
을 떨쳤다.
일본의 단편적인 기록에 고구려 사람들의 이름이 보이며 최근에 유명한 법륭사는 고구려 건축가
들에 의해 완성되었음이 유력시 되고있다. 이로써 보면 건축가들의 활동을 뒷받침해주는 건축사
회의 조직은 삼국, 일본이 흡사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십만 채,수백만 채 혹은 수천만의 집이 太初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든 건축물은 어떤
형태이던 建築家에 의하여 지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建築家라는 개념은 훈련되었든지, 훈련되지 않았든지를 區別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
렇지만 山間의 살림집은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지어진다. 마을 사람 전체가 집짓는 일
에 나선다. 그중 눈썰미 있고 손재주 있어 막음질 등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이
가 훈련되지 않았다는 점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公共建物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發注者가 있고 企劃·管理者가 있고 設計·施工者자 일을 분담하
게 된다. 이는 오늘의 방식과 같다.
현대에선 企劃·管理者도 일정한 과정을 훈련받은 사람이다. 設計와 施工者 역시 훈련된 사람들이
다. 이들은 서로 맡은 일이 다르면서도 建築家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길 희망한다.
이들의 본의로 생각한다면 建築家라는 이름은 꽤 넓은 성격이 부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도상
의> 작업(技能者), 實際의 작업(技能者)을 하는 사람들이 제각기 건축가로서의 基盤을 갖고자 원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은 도상작업만을 익힌 가냘픈 사람들에 의하여 더 강력히 욕망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분담한 일에 따라 그 이름이 명확하게 다르다. 하나는 "아키텍쳐"이고 또 하
나는 "엔지니어"이다. 그러나 이 이름에 따른 개념은 지역마다 시대에 따라 다르다. 우리는 "아키
텍쳐"를 건축가라고 부르려하는데 반하여 멕시코에서는 "잉에니엘"을 건축가로 보고 "아키텍트로
"는 技能者로 취급한다.
일에 따른 분담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을 짓기 원하는 建築主가 있고 그가 위촉하는 기획 ·
관리자가 있다. 이들은 새로 지을 집의 전반을 논의하고 그 규모를 설정한다. 기획 · 관리자는 보
통 土木役에 깊은 조예가 있어서 비록 자기 손으로 설계도를 그리거나 시공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일의 주선과 추진과 방향의 설정, 공정의 경과 등은 소상히 알고 있다.
건축주는 기획·관리자와 논의하여 설계·시공자를 선택한다. 설계와 시공자를 보통 宮闕을 짓는다
고 할 때 임금에 의하여 발주된다. 임금님이 건축주가 된다. 발의되면 그 일을 기획하고 관리할 都
監이 설치된다. 이 도감에는 都提調라는 최고 책임자가 임명되고 각기의 부서를 맡을 提調가 위촉
된다. 이들 제조중의 일부는 설계와 감리 등 실무에 참여한다.
건축주와 도감의 여러 사람들은 새로 지을 궁궐의 大要를 결정한다. 그들은 곧 설계·시공을 지휘
할 건축가를 물색한다. 이런 사람을 大木이라 함, 더러는 국가에 奉職한다. 국가에 봉직하는 대목
중의 우두머리를 木業指諭(都大木, 都司木, 都邊首)라 하고, 그에게는 각 분야를 담당하는 技術陣
이 예속된다.
한 예를 서울 남대문의 공사를 볼 수 있다. 이 공사에는 正五品 벼슬의 대목이 총책임자로 임명되
고 그의 隷下에 大木, 石手, 冶匠, 鞍子匠, 串錠匠과 方軍, 舡軍 등이 동원되었다.
그것을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남대문은 成宗10년(1479)년에 한번 더 改修된다. 이 때에도 기술자 그룹이 조직되었다.
이들의 벼슬은 대목이 禦?將軍으로 正三品 堂下官이고 都石手는 勵節校尉 從六品이며 畵員 迪副
將尉는 正七品으로 大木은 월등한 대접을 받는 직위이고 都石手는 그 보다 훨씬 격이 낮은 벼슬,
畵員은 그에 버금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이러한 等次는 이후 전시대에 걸쳐 고수되었고 大木이
위주되었다.
이와 같은 제도는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高麗史 祿俸條에 보이는 工匠
의 직위에 따라 이들이 건축활동에 참여하였을 때의 조직을 想定하여보며 대략 다음 표와 같이
되겠다.
이런 조직의 방법은 조선조와 거의 비슷하였던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고려의 木業指諭가 조
선의 대목으로 그 이름만 바뀌었다.
壬辰亂을 겪고난 후 이런 조직방식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사회가 발달되고 工役技能이 세분화
됨에 따라 분업의 성격이 농후하여졌고 그러한 것이 이 조직방식에 반영되었다. 高宗6年(1896
년)에 營建都監을 열고 東大門인 興仁之門을 중건하였다. 이때에는 다음 표와 같은 조직으로 공
사를 운영하였다.
초엽의 大木이라 할 목수편수(木手邊首) 수하에 木部從事부분이 ?踏·椽木·修粧·彫刻·木鞋·船匠·岐
鉅의 일곱 개 유형으로 세분되었다.
국초부터 말엽에 이르는 木手위주의 제도는 국영하는 건축물의 조직에서뿐만 아니라 祠·院의 權
威建築이나 백성들의 私家 경영에도 그대로 답습되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런 영향이 계속되
고있다. 대목이나 木手邊首라는 직위의 개념은 오늘날 건축가와 동등한 것이고 오히려 의미가 넓
어 시공 중의 종사자들의 기술적인 용역의 배려와 기능이 감독과 宿食의 통솔까지를 兼行하였다
대목이나 각 부분의 기술·기능자들은 계보에 따라 배출 등용되었고 그들 사회의 질서는 엄격하여
年下의 사람일지라도 일단 책임자로 임용되면 절대 복종하여야 되는 제도가 고수되었다
이런 조직의 방법은 고려, 신라에서도 대략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분야에 따른 가감이 있었
겠지만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기하여야될 의문에 부닥친다. 아비지라는 백제 건축가의 신라 사회에서의 활
동이 문헌에서처럼 실제로 가능하였던 것이냐의 여부가 궁금하여지는 것이다.
三國遺事(卷3. 黃龍寺九層塔條)에 선덕여왕 12년(643)에 慈藏法師가 唐나라에서 귀국하여 귀인
이 일러준 대로 황룡사에 구층탑 짓자고 건의하였다. 善德女王은 곧 9층탑 짓은 일을 착수하여
[鐵盤己上高 42척, 己下 183척]합계 225척의 거대한 탑을 완성하였다.
탑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시인들은 읊었다
어찌 사람만의 힘이랴.
귀신이 돕고
하늘이 부추겨
탑을 지으니
서울 장안의 제일일세
나는 듯 한 처마는
金碧으로 빛나니
꿈에 본 듯이 찬란하고녀
이 탑은 착공한지 2년만에 완공되었는데 백제 건축가 아비지가 이 일에 참여하였다.
탑을 조영하자는 논의가 있었을 때 여러 신하들은 백제에서 유능한 건축가를 초빙하여야만 이 일
이 이루어지겠노라고 하였다. 선덕여왕은 많은 예물을 보내어 초빙하니 백제왕은 아비지를 파견
하여 주었다.
아비지는 武烈王의 아버지인 龍春이 거느리는 200명의 小匠과 더불어 탑을 짓게 되었다. 단신 백
제에서 초빙된 아비지는 신라의 건축조직을 그대로 지휘하였다는 뜻이 되겠다. 龍春이 거느리는
小匠 200인도 고려나 조선왕조에서와 같은 조직으로 구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는
한 사람의 지휘를 소화시킬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지는 많은 백제의 건축가 중의 한사람이었다. 일본에 건너가 寺博士라는 칭호로 우대 받으면
서 건축물 경영에 참여한 다른 건축가들과 더불어 어깨를 겨루던 실력자였다고 생각된다. 기록에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 구체적인 사항은 알 길 없으나 이 건축가들은 사회의 신분도 상당하고 여
러사람들의 衆望도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선덕여왕이 선뜻 백제 건축가 초빙을 허락하는 까닭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음이 암시되어있다.
신라에서 일급의 왕족으로 하여금 백제건축가를 보좌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던 것은 백제 건축가
의 품격이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제 건축가 한사람 아비지가 초
빙되어 가서 전대미문의 9층탑이란 큰집을 지었다면 신라의 건축 사회가 백제의 그것과 같은
바탕이었을 것이고 그 건축사회의 조직도 한가지였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고구려도 아
마 같은 성격이었으리라고 보인다.
삼국이 통일된 이후, 이젠 신라인이 된 망국 백제의 건축가들은 자연히 신라 건축계에서 활약하였
을 것이다. 이제 그들 건축가의 이름은 거의 다 잊었지만 불국사 중창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阿
斯達이라는 전설의 인물이 있다. 그도 아비지와 동족인 실제의 건축가이었을지도 모른다.
백제 건축가들의 해외진출은 매우 활발하여 신라, 일본 등지에 많은 사람들이 건너가 자기의 기량
을 떨쳤다.
일본의 단편적인 기록에 고구려 사람들의 이름이 보이며 최근에 유명한 법륭사는 고구려 건축가
들에 의해 완성되었음이 유력시 되고있다. 이로써 보면 건축가들의 활동을 뒷받침해주는 건축사
회의 조직은 삼국, 일본이 흡사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